출처: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899193
9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정보전달 도구가 있다. 학교 앞의 통행이 많은 건물 벽에 붙어 있는 게시판(물론 학교에 따라 이런 도구가 없었거나 형태가 달랐을 수 있겠다). 그 게시판에는 특정한 그룹이나 개인에게 어디 가서 놀고 있을 테니 이 가게로 오라는 메시지가 담긴 포스트잇이 가득했다. 이런 식이다. "심리학과 96학번 OO호프집", "OOO야, XX당구장에 있을 테니 빨리 와라". 휴대폰이 없던 시절 아날로그적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방법인데, 디지털 세대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이 구식의 정보전달 방법에도 나름의 장점은 있었다. 공개되어 있다 보니 특별한 약속도 없고 집에 가기는 싫은 날에 게시판을 보다 보면 대충 낄 수 있는 자리도 찾을 수 있는 거다. 수신자를 특정해 필요한 멤버들에게만 정확히 전달하는 카카오톡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포스트잇과 펜만 있으면 되니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누구나 쓸 수 있었다.
최근에 블록체인 기술로 해볼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블록체인 기술에 존재하는 이러한 특성을 활용해보는 게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누구나 일정 비용만 내면(포스트잇값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어떤 메시지를 저장하고 여러 사람이 상시로 조회(공개된 게시물)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수많은 노드들이 약속에 따라 안전하게 메시지를 저장하고 있고, 위변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누구나 조회 가능하면서도 조작 가능성이 없는 디지털 증서를 저렴한 비용으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블록체인 기술 없이도 그렇게 구성할 수는 있다. 하지만 어떤 기업이나 단체가 블록체인 네트워크 없이 디지털로 증서를 만들어 상시로 조회할 수 있게 하려면 엄청난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항상 웹서비스와 DB를 운용하는 일부 기업들에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이 디지털 증서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부러 웹서버와 DB를 구축하는 비용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비용도 1회성이 아니다. 만들어진 내용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면 보안과 운영에도 지속적으로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디지털 정보는 조작이 이루어져도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에 위변조 여부를 확인하는 시스템도 별도로 갖춰야 한다.
필자가 속한 아이콘 프로젝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이 편한 UI(User Interface)를 갖춘 디지털 문서 발급 서비스를 내 놓았다. 웹 사이트(broof.io)에 접근해서 몇 가지 정보만 입력하면, 위변조 불가능하고 반영구적으로 조회 가능한 디지털 증서를 쉽게 만들 수 있다. 이미 서울시와 포스텍 등의 공공기관과 학교가 이를 활용해 위촉장, 교육과정 수료증에 활용했다. 당연히 서울시와 포스텍은 큰 비용을 들여 위변조 불가능한 디지털 문서를 발행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필요가 없었다. 스마트하게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해 가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아이콘이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다. 원래 구축되어 잘 돌아가고 있는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특성과 장점(trust network)을 충분히 활용하고, 사용자를 위해 UI만 유저 친화적로 만들었을 뿐이다.
많은 전문가들이 앞으로 블록체인 기술이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활용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때문에 일부기업은 용도를 특정하지 않고 일단 큰 비용부터 투입해서 블록체인 네트워크 구축부터 검토하기도 하는데, 의사결정 과정에서 리스크가 크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기술을 어떻게 써야 고객에게 가치를 줄 수 있는지 아직 모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아이콘이 내놓은 브루프(broof) 서비스는 블록체인 응용서비스를 검토하는 기업에 주는 시사점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신기술로 구성된 퍼블릭 네트워크의 기초적인 특성만 활용해도 기존 기술과 방법론 대비 훨씬 적은 비용으로 고객에게 가치를 전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블록체인 기술이 만들어낼 미래의 모습이 어떠할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지금 시점엔 이렇게 적은 비용을 들여 기술의 가장 기본적인 특성을 활용해 보는게 현명한 전략일 수 있다. 그렇게 일단 시도를 해서 고객의 작은 문제를 해결하고 운영하다 보면 두 번째 세 번째 아이디어가 나오고, 그 중에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세상의 성공한 서비스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어느 날 깨달음을 얻어 대박이 나는게 아니라 일단 작은 문제를 해결해 사람들이 쓰기 시작하고, 그 사용자들의 경험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대형 성공으로 이어지는 익숙한 스토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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